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태성 사건 (문단 편집) == 간첩이 된 밀사? == >"원심 판결은 (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소위 적국간에도 (밀사를) 사형치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관례'''인지라 하물며 비록 괴집(괴뢰집단)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어떤 사항을 논의하는 정도라면 그것만으로서 극형을 선고할 필요성의 여부를 고려하여야 할 것인바… (저는) 1955년 9월부터는 괴집(북한)에서 일체의 관직을 탈취당하였으며 특히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간곡한 탄원서를 1962년 5월10일자로 제출하였으므로 자유정부인 대한민국의 품 안에 돌아오려는 피고인에 대하여 극형을 처함은 양형이 심히 부당하다.” >---- >1963년 초 군법재판에서 황태성의 진술 中 황태성은 줄곧 자신이 '''북한에서 온 밀사'''라고 주장했다.[* 권상릉이 황태성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그의 임무는 5.16 직후 군사정권이 북으로 공작원을 보낸 진의 파악, 남쪽의 남북협상회의 제안, 남북 간 비밀무역 대표부 설치, 박정희에게 중대 정보 제공 등이었다고 한다.] 그는 줄곧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종필은 그를 '''밀사가 아닌 간첩'''으로 여겼고 박정희도 황태성을 껄끄러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일각에서는 황태성이 박정희하고 3번이나 개인적으로 만났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못했다. 1992년에는 김종필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황태성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만난 적이 없다'고 번복하기도 했다.] 반도호텔에서 조사를 받던 황태성은 이후 [[서대문형무소]]의 조그마한 독방에 갇혀 일반 [[간첩]] 혐의자로 취급받았다. 한편 [[미국]]도 황태성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미국은 군사정부에게 황태성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언론인 [[문명자]]는 황태성 사건을 조사하다가 추방당한 미국 정보기관원 래리 베이커와 1963년에 연락을 주고받았다. 래리 베이커는 문명자에게 "황태성과 김종필이 반도호텔에서 나눈 이야기를 모두 조사해 상부에 보고했다. 황태성이 내려온 목적은 박정희와의 연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측은 황태성을 미 정보기관에 인도하라고 했지만 박정희는 시간을 끌었고 나를 추방했다."는 내용의 회답을 보냈다. 문명자는 그의 회답을 토대로 [[조선일보]]에 기사를 송고했지만 신문에는 실리지 못했다.] 1961년 11월경 황태성은 미군으로부터 2주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과 박정희-황태성 간의 관계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던 박정희 군사정부로서는 속이 탈 일이었다.[* 또 그 달에는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다행히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를 만족시켰다.] 실제로 쿠데타 초기 미국은 박정희와 김종필 등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박정희는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성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황태성은 '''비공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고 1961년 12월 27일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접촉한 김민하와 권능상은 각각 [[징역]] 10년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황태성은 이 판결에 항의해 자신은 밀사로 왔다는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항소했다. 하지만 1962년 9월 11일 육군고등군법회의는 김민하와 권능상의 형량만 대폭 낮추어 주었을 뿐 황태성의 항소는 기각해버렸다. 황태성은 이에 불복해 상고하였다. 당시 김종필의 반대파였던 [[김용순]]과 [[김재춘]]이 [[중앙정보부]]를 쥐고 있었다. 그러한 여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교롭게도 상고심은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고, 환송 후 원심은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하지만 환송 후 원심에서는 피고인에게 간첩죄의 혐의가 추가되었다. 그 결과 환송 후 원심법원은 1963. 7. 2.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피고인인 황태성은 다시 상고하였으나, 상고가 기각되면서 그에 대한 사형판결이 확정되었다. 한편 비밀로만 부쳐졌던 황태성 사건이 1963년 9월 들어 점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침 [[제5대 대통령 선거|대선]]을 앞두고 있을 때였기에 야당 후보 [[윤보선]]은 대선 직전 [[여수·순천 10.19 사건]]과 황태성을 들먹이며 [[박정희]]를 압박했다. 야당은 황태성의 존재를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을 공격하는데 요긴하게 써먹었다. 예를 들어 1963년 9월 25일에는 유인물을 뿌려 황태성과 [[박정희]] 간의 커넥션이 존재한다는 [[음모론]]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야당 지지 성향 신문들을 통해 호외로 뿌려지며 퍼져나갔다. 이는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를 다시금 자극시켰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황태성 사건이 더 이상 파장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행히 야당의 과도한 [[매카시즘]]적인 공세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박정희는 15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박정희는 자신이 그토록 시달렸던 [[매카시즘]] 공세를 그대로 이어받아 야당과 정적들을 상대로 마구 사용했다.]. 황태성은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며 살고자 애썼고 처형 직전에도 [[미국]]과도 몇 번 접촉하기도 했다.[* 황태성과의 계속된 접촉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공론화되지 않고 묻혀버린 것은 아마 미국도 황태성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거의 없어서였을 것이다.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만난 미국 정보요원에게 "우리가 알아낸 것 외에 더 알아낸 것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1963년 12월 14일 오전 9시 20분 경 재심 중이었던 황태성은 인천 근교의 군부대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민족의 완전자주독립과 남북통일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복역을 마치고 나온 권능상이 확인하였다. 그리고 1964년 9월 서울고등법원은 그의 재심을 기각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북한은 박정희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거두고 박정희 정권을 향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후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위해 [[이후락]]이 북한으로 갔을 때 그는 자신도 황태성처럼 될 것을 우려해 [[청산가리]]를 품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황태성이 사형당한 지 3일 후인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